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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활동의 현대적 재조명

by 숨결筆 2025. 5. 15.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사에서 신간회(新幹會)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조직이다. 1927년에 결성된 신간회는 좌익과 우익,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대하여 민중을 위한 정치·사회운동을 전개한 단일 조직이었다. 합법적 활동을 지향하면서도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등 다양한 부문에서 목소리를 냈으며, 전국적으로 지회를 설립해 민중 계몽에 힘썼다. 신간회의 활동은 단지 과거에 머무는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사회 통합과 연대의 정신을 재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유산이다. 이 글에서는 신간회의 결성 배경, 주요 활동, 해소 이유, 그리고 현대적 의미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신간회의 결성 배경

1920년대 후반 조선 사회는 일제의 강압 통치와 경제 수탈로 인해 극심한 혼란에 직면하고 있었다. 3.1 운동 이후 민족운동은 한층 다변화되었고, 국내외에서는 무장 투쟁, 문화운동, 교육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 시기 운동 세력은 이념 갈등으로 인해 분열되는 경향이 컸다. 특히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이견이 극심하여 통일된 운동 전선을 형성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민족 해방이라는 공동 목표 아래 좌우합작을 실현한 조직이 바로 신간회였다. 1927년 2월 15일, 서울에서 창립된 신간회는 이상재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전국적인 대중운동을 전개할 준비에 나섰다.

좌우합작의 상징적 의미

신간회는 좌익과 우익 세력이 한자리에 모여 민족 문제를 논의한 최초의 전국 조직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민족주의계 대표로는 이상재, 홍명희, 송진우 등이 있었고, 사회주의계에서는 문창범, 허헌, 김병로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서로 이념은 달랐지만, 민중 해방과 민족 독립이라는 목표를 공유하였다. 특히 이상재는 “내가 죽으면 이 세상에서 좌우는 하나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한 통합 의지를 보였다. 신간회는 좌우합작이라는 한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형태를 현실화시킨 역사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지방 지회 조직과 대중 계몽

신간회는 단순히 중앙 조직에 그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14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하였다. 각 지역 지회는 강연회, 야학, 노동자·농민 대상의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학생운동과도 긴밀히 연계되었다. 특히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지방 농촌 지역에서의 활동이 활발했으며, 신간회의 영향력은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확대되었다. 이들은 일제의 고등 경찰과 행정 탄압에 맞서며, 사회 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등 국민 계몽을 위한 실천 활동을 전개했다. 그 중심에는 ‘비타협 민족주의’와 ‘계급 해방’이라는 상반된 이념을 포괄하는 유연한 조직 정신이 있었다.

노동운동과 여성 참여 확대

신간회는 당시 여성과 노동자 계층의 참여를 유도한 진보적 성격의 조직이었다. 여성은 교육과 강연, 출판 활동을 통해 점차 정치 사회 활동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노동운동 역시 신간회의 지원을 통해 조직화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원산 총파업 사건(1929)을 들 수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원산 지역 노동자들의 권리 요구에 대해 무력 진압으로 대응했으며, 신간회는 이에 강하게 항의하고 적극적인 지원 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많은 회원들이 체포되거나 감시 대상이 되었지만, 신간회는 중단 없이 활동을 지속하였다.

광주학생운동과 신간회의 연계

1929년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대규모 학생 시위였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학생 간 충돌이 아닌, 식민지 차별 교육과 인권 침해에 대한 민중의 집단적 분노가 표출된 사건이었다.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규탄대회와 연대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는 일제의 철저한 탄압을 불러왔고, 결과적으로 신간회는 '불법단체'로 낙인찍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활동을 통해 신간회는 민족운동의 구심점으로 재확인되었다.

해소의 원인과 평가

1931년 신간회는 공식적으로 해소되었다. 겉으로는 조직 내부의 이념 갈등과 외부 탄압이 원인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통합 조직의 한계였다. 좌우 세력은 각기 다른 전략과 목표를 가졌기에, 특정 사안에 대한 대응에서도 큰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예컨대 ‘사회주의적 혁명’과 ‘자주적 민족운동’ 사이에서 노선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해소 이후에도 신간회의 정신은 국내외 독립운동 조직에 영향을 끼쳤으며, 해방 후 진보·보수 양 진영 모두로부터 재평가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신간회의 재조명

오늘날 한국 사회는 여전히 진보와 보수, 이념과 세대, 지역과 계층 간의 갈등 구조를 안고 있다. 이 가운데 신간회의 좌우합작 정신은 사회 통합의 역사적 모델로 다시 조명되고 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하나의 공동 목표를 위해 협력했던 경험은, 갈등과 분열이 반복되는 오늘날 한국 정치와 시민 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신간회는 ‘다름 속의 연대’라는 가치를 실현한 희귀한 사례로, 시민 참여, 인권, 민주주의의 뿌리를 재해석하는 데 유용한 역사적 자원이다.

맺음말

신간회는 단순한 과거의 민족운동 조직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이념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연대하고 실천했던,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유의미한 통합운동이었다. 오늘날의 사회가 신간회의 정신을 되살린다면, 더 넓고 깊은 시민 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