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 민중에게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조선어학회는 바로 이 언어를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1931년 조선어연구회에서 개편된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표준어 규정,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 등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언어 연구와 보급을 추진했다. 이들은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학문적·실천적 저항을 이어갔으며, 해방 이후 한글문화의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본문에서는 조선어학회의 활동 배경, 주요 사업, 탄압과 희생, 그리고 현대적 의미를 중심으로 조명한다.
언어 말살 정책 속의 대응 조직
조선어학회는 단순한 학술 단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문화적 저항의 결집체였다. 1930년대 들어 일제는 조선어 사용을 점진적으로 제한했고,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은 선택에서 폐지로 전환되었다. 공식 문서나 언론, 공공기관에서도 일본어만을 사용하도록 강제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언어를 지키려는 민간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고, 조선어학회는 이 흐름의 중심에 섰다. 이 단체는 국어의 과학화, 표준화, 체계화를 통해 언어 보존을 실현하려는 목표를 분명히 세웠다.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 확립
조선어학회의 가장 대표적인 성과 중 하나는 1933년에 발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었다. 당시까지도 조선어는 문법과 표기가 사람마다 달라, 통일된 규칙 없이 사용되었다. 학회는 국문학자, 국어학자, 교육자 등 다양한 전문가들을 모아 회의를 거듭한 끝에 통일안을 완성하였고, 이 안은 오늘날까지도 한글 맞춤법의 뿌리로 남아 있다. 같은 해에는 『표준어 규정』도 제정되어 말의 지역별 편차를 정리하고 통일된 소통 기준을 마련했다. 이 두 가지 작업은 민족 언어의 학문적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실생활에서의 사용 기반을 강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
조선어학회의 가장 방대한 프로젝트는 『조선말 큰사전』의 편찬이었다. 이는 단순한 어휘 수집이 아니라,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함께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1929년부터 준비된 이 사업은 조선어의 방언, 고어, 속담, 관용어 등을 망라하여, 우리말의 모든 층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학회는 전국 각지의 필자들에게 원고를 의뢰하였고, 방언 조사단을 파견하여 생생한 언어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활동을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결국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통해 사전 편찬을 중단시켰다.
조선어학회 사건과 탄압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을 일제히 검거하고, 그중 1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였다. 이 사건은 단지 사전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루어진 폭압적 조치였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불린다. 주요 인물로는 이윤재, 최현배, 이극로, 김윤경 등이 포함되었고, 이윤재는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의 언어 말살 정책이 단순한 교육 통제를 넘어, 문화 전체를 지배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조선어의 소중함과 학자들의 헌신은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해방 후 사전 편찬 사업은 다시 이어지게 된다.
언어 보존을 통한 민족정신 유지
조선어학회는 언어라는 비무장 저항의 방식을 선택했다. 총과 칼이 아니라 글과 말로 식민 권력에 저항한 그들의 활동은, 언어가 곧 정체성이고 정신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조선어를 지키는 일은 곧 조선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문화적 저항이었다. 학회는 언어의 체계적 정리와 연구를 통해 후손에게 ‘지킬 수 있는 언어’를 물려주었고, 이는 오늘날 국어교육과 학문적 기반의 초석이 되었다.
현대적 재조명: 디지털 시대와 조선어학회의 유산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언어의 변화 속도는 과거보다 훨씬 빨라지고 있다. 외래어의 유입, 신조어의 범람, 문자 소통의 축약화는 언어 생태계에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현대 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언어를 체계화하고, 기록하고, 후세에 전하는 작업은 시대를 초월한 과제이다. 현재 국립국어원, 한글학회 등 관련 기관들은 조선어학회의 정신을 계승하여 온라인 국어사전 구축, 방언 DB화, AI 언어 데이터 수집 등의 현대화된 언어 보존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학문을 통한 실천과 애국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단순한 학술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을 위한 실천이었고, 문화적 애국의 표현이었다. 총독부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그들은 사전을 만들었고, 맞춤법을 통일했으며, 언어를 가르쳤다. 이들의 활동은 ‘조용한 항일운동’이라 불릴 만큼 학문을 통한 저항의 정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해방 이후 한글날 제정, 국어기본법 제정, 학술어 정비 등 다양한 형태로 이어졌다.
맺음말
조선어학회의 언어 보존 활동은 단순한 문법 정리나 사전 편찬을 넘어, 조선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위대한 문화 운동이었다. 그들이 남긴 정신은 오늘날에도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며, 후손에게 전하는 책임으로 이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