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조선은 안팎으로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 놓여 있었다. 내부로는 세도 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의 삶이 피폐해졌고, 외부로는 서구 열강의 무력 통상 요구가 점차 거세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집권한 인물이 바로 흥선대원군이다. 그는 과감한 정치 개혁과 함께 '쇄국 정책'이라는 강경한 대외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조선의 정체성과 체제 유지를 꾀했다.
이 글에서는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어떠한 배경에서 시작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집행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본다.
1. 흥선대원군의 집권 배경
흥선대원군(이하응)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로, 어린 고종이 즉위하면서 섭정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몰락했던 남인 계열이었지만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 중심에 섰다.
- 세도 정치 척결 → 안동 김 씨 등의 외척 제거
- 왕권 강화 → 국왕 중심 통치 회복
- 경복궁 중건 → 왕조 권위 회복 상징
이러한 개혁은 내부 체제를 정비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외부와의 관계 설정에서는 매우 폐쇄적인 방향을 택했다.
2. 쇄국 정책의 배경과 전개
쇄국 정책은 말 그대로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는' 외교 정책이다. 흥선대원군은 외세의 침투를 극도로 경계했으며, 특히 기독교(서학)의 전파와 서구 세력의 통상 요구를 조선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쇄국 정책의 주요 이유
- 서양 세력에 대한 불신과 공포
- 기독교의 민중 확산에 따른 사회 불안
- 청나라와의 외교 실패 후 자주권 의식 고취
- 조선 고유의 질서 유지
이러한 배경 아래 흥선대원군은 외세와의 접촉을 원천 차단하고 선교사 및 관련 인물들을 처형하며 물리적 충돌도 불사했다.
3. 관련 사건 정리
① 병인박해 (1866년)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포함해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를 처형한 사건이다. 이는 이후 '병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② 병인양요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공격하여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하고 철수한 사건이다. 조선은 양헌수 장군의 정족산성 방어로 부분 승리했지만 실질적인 국력 차이를 드러낸 계기였다.
③ 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 침입해 통상을 요구하다가 주민과 관군에 의해 불태워진 사건이다. 이는 미국의 보복성 무력시위로 이어졌다.
④ 신미양요 (1871년)
미국이 강화도에 상륙해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를 점령하고 외교 접촉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건이다. 조선은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끝까지 조약을 거부했다.
이러한 무력 충돌들은 흥선대원군의 강경 쇄국 노선을 상징하며, 조선이 외세에 맞서 자주권을 고수하려 했던 의지를 보여준다.
4. 쇄국 정책의 긍정적 평가
- 자주성 유지: 무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주 외교를 고수한 점
- 내부 개혁 병행: 세도 정치 청산과 군제 정비로 체제 재정비
- 국가 정체성 유지: 조선 고유문화와 체제를 보호
- 민심 수렴: 외세에 반대하는 여론과 보조를 맞춤
흥선대원군은 약소국임에도 불구하고 강경한 외교 전략을 통해 국권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5. 쇄국 정책의 부정적 평가
- 근대화 지연: 서구 문물과 과학 기술 도입 기회를 상실
- 고립 심화: 국제 정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채 주변국에도 뒤처짐
- 서구 침략 빌미 제공: 선교사 처형이 무력 개입의 구실이 됨
- 군사력 격차 확인: 병인양요·신미양요에서의 무기력한 대응
결과적으로 조선은 세계 질서 변화에서 소외되었고 이후 개항과 국권 침탈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도 있다는 점에서 쇄국 정책은 한계가 명확한 정책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6. 쇄국 이후의 변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민 씨 세력이 정권을 잡은 후,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결국 조선은 개항하게 된다. 이로써 쇄국 정책은 종결되고 외세와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며, 조선은 본격적인 근대사로 접어들게 된다.
흥선대원군의 정책은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귀결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이 지닌 자주적 저항 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기였다.
결론 – 강경과 고립 사이의 선택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자주권을 지키려는 고집이자, 근대화를 외면한 고립이기도 했다. 그는 외세에 맞서려 했지만 결국 시대 변화에는 대응하지 못했다. 그 의도는 순수했지만 결과는 아쉬움을 남긴다. 오늘날 이 정책은 '주권 수호'와 '국제 감각 부족'이라는 이중적 평가 속에서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있다.